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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그라나다의 상징 알함브라 궁전에 가다 (1편) - 카를로스 5세궁과 알카사바

비행청년 a.k.a. 제리™ 2016. 12. 5. 08:00

 

 

아끼는 제자의 부인을 짝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용기내어 고백을 했지만, 당연히 거절을 당했고 실의에 빠진 그는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야심한 밤 달빛으로 물든 궁전을 보며, 그는 실연당한 자신의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명곡이 탄생하게 된다.

 

 

그라나다의 상징, 알함브라 궁전. 이슬람 왕조가 그라나다를 점령했던 그 시절, 왕이 살던 '나사리 궁'의 아름다움은 미처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나사리 궁 옆에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가졌던 카를로스 5세의 이름을 딴 궁전이 있다. 스페인 시대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카를로스 5세 궁은 지반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나사리 궁을 조금씩 찍어 누르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군사들이 살던 알카사바와 왕들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도 시간 여유가 된다면 둘러볼 만 하다.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내뿜을 것 같은 3월의 어느 날, 알함브라 궁전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구경할 곳은 카를로스 5세 궁전이다. 이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박물관이 연상된다. 하지만 정작 이 곳에는 단 한 점의 예술품도 없다. 그러니 겉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말자.

 

 

르네상스 양식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1층과 2층의 건축 양식이 다르다. 16세기에 건축했을 때에는 1층만 지었고, 수 백년이 지난 뒤에야 2층을 증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분명 밖에서 봤을 땐 네모난 건물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원형 무대가 있다. 이 궁전을 지은 카를로스 5세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다고? 그래, 꽃보다 할배에서 신구 할아버지가 소리를 '꽥' 지르던 바로 그 곳이다. 공명현상 덕분에 무대 가운데 동그라미에 서서 말을 하면, 그 소리가 내부에 울려퍼지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텅 빈 무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갑자기 비가 미친듯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젠장! 우산을 챙기긴 했지만, 막상 비가 세차게 내리니 당황스러웠다. '아, 다음 코스인 알카사바는 야외라 비가 내리면 쫄딱 맞을 수 밖에 없는데...' 실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라나다 궁전은 입장권을 예매할 때, 시간대별로 나사리 궁에 입장하는 관광객 수를 적당히 배분한다. 따라서 입장권에 적힌 시간을 놓치면 그라나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나사리 궁 관람을 할 수가 없다. 이미 나사리 궁 입장 시간에 맞춰 일정을 세워뒀기 때문에, 카를로스 5세 궁전에서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세비야에서는 일정 때문에 구경하지 못했던 알카사바를 그라나다에서 만났다. 알카사바는 군사들이 머무르는 일종의 요새 같은 것인데, 멀리서 공격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탑을 높게 쌓은 후, 주둔지를 설치한다. 9세기에 건축된 그라나다의 알카사바에는 막사 뿐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이나 창고, 심지어 목욕탕까지 갖춘 하나의 작은 마을같은 구조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냥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둔지 터를 감상했다. 남들은 이 자리에서 알바이신 지구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본다는데, 전경은 개뿔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비구름은 잔뜩 품고 있는 하늘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내 뺨을 적시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못된 짓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하늘이 내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잦아들고 뿌연 하늘이 서서히 맑아지더니, 알카사바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 해 8월에 여행했던 페루의 마추픽추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빨리 유럽여행 포스팅을 마무리하고 남미 포스팅을 시작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새삼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알카사바에서 바라본 알바이신 지구의 모습이다. 비가 내렸다 갠 직후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채도가 높다고 해야하나? 조금은 과장되어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사진이 찍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비가 계속 내려 이런 장면 하나 감상하지 못하고 내려왔다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을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카사바에서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희'와 '락'으로 끝난 해피엔딩이었다는 게 참 다행스러웠다. 여전히 흐리지만 아까보단 조금 나아진 날씨에 즐거운 마음과 약간의 기대를 품고 나사리 궁으로 향했다. 그래, 이제부터가 알함브라 궁전의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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