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쓰는 여행스토리/꽃보다 유럽

52. 인간과 황소의 고독한 싸움, 론다에서 투우의 역사를 더듬다.

비행청년 a.k.a. 제리™ 2016. 11. 7. 08:00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문이 열리고, 잔뜩 약이 오른 황소의 그림자가 어슴프레 보인다. 이글대는 태양 때문일까?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황소의 모습에 귓가의 함성소리는 어느새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 처럼 고요해진다. 오늘도 무사히 끝낼 수 있으리라...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내면, 저 깊은 곳에는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온화해보이는 사람들조차도 '피'를 보면 열광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다.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에서부터 UFC의 옥타곤까지, 수많은 전사들이 인류의 폭력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피를 튀기며 서로 싸워왔다.

 

 

여기, 르네상스 시대의 폭력성을 응축한 공간이 있다. 론다를 여행한다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인 '론다 투우장'을 꼭 한번 방문해보자. 최근 들어 투우의 나라, 스페인에서조차 잔인함을 이유로 많은 지역에서 투우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 곳 론다의 투우장은 아직까지 투우 경기를 개최하는 몇 안되는 투우장 중 하나라고 한다.

 

 

마타도르(Matador), 투우 경기의 마지막에 등장해 소의 심장에 창을 꽂는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다. 붉은 천을 들고 황소를 이리저리 유인하는데, 투우장 앞의 작은 동상은 마타도르의 유려한 몸놀림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투우 경기를 개최하는 론다에서조차 투우 경기를 직접 관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절기 시즌에 미리 경기 일정을 파악하고 있어야 제 때, 론다를 방문해 경기를 볼 수 있다. 들리는 말로는 투우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잔인하기 때문에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낫다고 한다. 대신, 비 시즌에는 입장권을 구매해 내부를 마음껏 둘러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라. (입장료는 7유로)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진다. 투우장에 마굿간이라니... 순간 내가 투우장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여기 있는 말들은 경기 중에 황소를 흥분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루시타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서식하는 종으로 순발력과 지구력이 뛰어나 전투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루시타노는 기동력은 물론 반응속도가 매우 빨라서, 투우 경기 중 돌진하는 황소를 피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루시타노가 머무르는 마굿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이 곳,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황소가 머무르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투우 경기가 열리지 않는 시즌(3월말)이라 그런지 이 곳은 텅텅 비어있었다.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투우 경기장의 모습! 밤 사이 내린 비로 흙이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생각보다 넓은 운동장(?) 크기에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지름이 66m나 된다고 한다. 2층으로 이뤄진 관중석의 수용인원은 약 6,000명으로 잠실 학생체육관(7,000여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투우 경기가 시작되면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소리를 지를테고, 그 소리에 놀란 황소가 드넓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겠지? 눈을 감고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투우 경기의 장면을 머릿 속에 떠올려 본다.

 

 

이건 아마도 황소가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문이 아닐까? 문이 열려진 공간은 황소가 출입하기에 조금 작아 보인다. 그 옆으로 RMR이라 적힌 쪽은 황소 사이즈가 맞을 것 같은데 문이 열리는지는 미처 확인을 못했다. '저 문을 황소가 부수고 입장하는 것도 멋있을텐데...' 라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저 뒤로 완만한 아치를 그리는 기둥과 계단식 관중석에 적힌 좌석번호가 어렴풋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관중석의 기둥과 기둥 사이의 아치가 매우 질서정연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1700년대 후반, 신고전주의 양식의 절제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1, 2층은 물론 지붕에 세워진 석상(?)까지 열을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른 투우장은 안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들리는 말로는 론다의 투우장이 스페인 전역의 투우장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투우 경기를 묘사한 아줄레주가 한땀 한땀 새겨져 있다.

 

 

2층에서 바라본 투우장의 모습! 이렇게 보니, 세비야에서 보았던 스페인 광장이 떠오른다. 원형 건물이 주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잔뜩 흐린 하늘까지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을 꼭 빼닮았다. 이런 젠장!

 

 

어디서 보든 그저 비슷한 뷰가 펼쳐지기 때문에 관중석을 둘러보는 데에는 사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1층과 2층을 대충 훑어본 후,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1984년 마련된 투우 박물관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투우사들이 입었던 의상과 각종 무기 등 투우와 관련된 물건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흠, 이걸 보니, 치사하게 총을 사용하는 투우사도 있나보다.

 

 

화려한 투우사의 복장과 크고 작은 창, 그리고 보는 것 만으로도 약간 소름이 돋았던 황소의 머리까지... 모형인지 박제품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벽에 걸린 소의 눈을 보니 어깨에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어서 가서 보일러를 켜든지 해야겠다.

 

 

역사적으로 투우는 목축업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신에게 제물로 숫소를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로 국민들이 즐기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스포츠이자 문화로 자리잡았다. 스페인 내란, 프랑코의 독재정치 등 스페인 사회가 어둠을 맞이했을 때마다, 명 투우사가 등장하여 국민들의 허한 마음을 달래며 영웅대접을 받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동물보호론자들을 중심으로 투우의 잔인함을 비판하고, 많은 지역에서 투우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있지만,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투우는 매우 중요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남는 시간에 잠깐 스치듯 훑고 가지만, 론다 투우장의 모습은 꽤 오래도록 머릿 속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관련글 -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포스팅으로 이동합니다.

* 여행준비

1.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을 준비하며,

2. 포르투갈-모로코-스페인, 도시별 체류 일정

3. 열차예매를 위한 꿀팁, 페이팔 계정 만들기

4. 여행계획 세울 때, 알아두면 유용한 사이트

5. 배낭여행 짐을 싸며, 유럽 여행 준비의 마침표를 찍다.

 

* 꽃보다 유럽 :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01. 24박 25일, 꿈만 같았던 순간들

02.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오르다

03. 유럽 여행 도시별 핵심정보 - 마드리드 편

04. 짜릿했던 스페인에서의 첫날밤, 프리메라리가 직관 후기

05. IE 비즈니스 스쿨과 함께 한, 마드리드 생활 2일차

06. 마드리드 씨티투어 - 알무데나 성당, 마드리드 궁전 등

07. 유럽 3대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을 공짜로 즐겨보자!(feat. 레티로 공원)

08. 작지만 아름다운 동화 속의 마을, 세고비아 - 악마의 다리, 세고비아 대성당

09. 백설공주의 성, 세고비아 알 카사르에 가다

10. 꽃할배도 반한 세고비아 전통요리를 즐겨보자! - 코치니요 전문점 메종 데 깐디도

11. 도시의 진정한 매력은 광장에서 나온다. - 마드리드 3대 광장 집중 탐구

12. 세련미 넘치는 마드리드 전통시장, 산 미구엘 시장을 가다.(feat. 산 기네스 a.k.a. 대왕 츄러스 가게)

13. 마드리드에서의 시작과 끝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14. 작지만 아름다운 포르투, 그리고 타트바(Tattva) 호스텔

15. 포르투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무료 워킹투어 체험기

16. 포르투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메뉴, 프랑세지냐 맛집 피코타(Picota)

17. 와인에 대한 당신의 상식을 넓히는 순간, 포르투 와이너리 투어

18. 포르투 최고의 핫 플레이스 (1편) - 밤에 더 아름다운 동 루이스 다리

19. 동화 속 상상이 현실로 - 해리포터의 배경, 렐루 서점에 가다

20.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포르투, 클레리고스 종탑에 오르다

2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날드를 찾아서

22. 포르투 최고의 핫플레이스(2편) - 도루 강의 물줄기를 따라서

23. 야간버스를 타고 리스본으로...(부제 - 새벽녘의 멘붕)

24. 대서양과 맞닿은 절벽마을, 아제나스 두 마르(Azenhas do Mar)에 가다.

25.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위엄이 그대로, 신트라 무어인의 성

26. 신트라 숲 속에서 찾은 아름다운 보석, 페나 성에 가다.

27. 대륙의 서쪽 끝, 호카곶에서 석양을 바라보다.

28. 리스본 여행의 단 하나의 이유 - 에그타르트 맛집, ​Pasteis de Belem(파스테이스 데 벨렘)

29. 리스본을 떠나기 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다.

30. 드디어 아프리카! 모로코 마라케시에 첫 발을 내딛다.

31. 마라케시에서 메르주가까지, 모로코 사막투어의 긴 여정을 시작하다.

32. 글레디에이터의 배경, 아이트 벤 하두 투어기 

33. 사하라 사막은 어디에...? 지루하게 흘러간 사막 투어의 첫 번째 하루

34. 사하라 사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베르베르족 마을과 토드라 협곡

35. 낙타 등 위에서 내려다 본 사하라 사막,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지우다.

36. 대서양만큼이나 파란 하늘을 품은 도시, 에사우이라

37. 여행의 묘미, 예정에 없던 곳에서 뜻밖의 추억을 건지는 것 - 모로코 항구도시, 에사우이라

38. 다시 찾은 마라케시, 모로코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길을 잃다.

39. 입생로랑이 사랑한 코발트 블루의 세상,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

40. 그 곳은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아름답다 - 밤에 더 밝게 빛나는 제마 엘프나 광장

41. 다시 유럽으로... 세비야에서 맛 본 '오늘의 메뉴'

42. 세비야 대학에서 버스 터미널을 거쳐 대성당까지, 세비야에 도착하자마자 강행군이 시작되다.

43.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 모든 것이 맘 같지는 않더라! - 메트로폴 파라솔과 스페인 광장에서의 허탈함

44. 지난 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스페인 광장으로 향하다.

45. '죽어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 콜럼버스의 유언을 지킨 4명의 왕

46. 세비야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 눈에, 히랄다 탑에 오르다.

47. 미슐랭 별이 셋! 세비야 최고 맛집, 'Casa la Viuda'(까사 라 비우다)

48. 깎아진듯한 절벽 위 요새 같은 호텔, 파라도르 데 론다

49. 절벽위의 작은 마을, 론다에서 1박을 해야 하는 이유

50. 여유 넘치는 아침, 한적한 비탈길을 오르다. - 론다 구시가지 도보여행

51. 낮에 다시 찾은 누에보 다리에서 자연과 건축의 하모니를 느끼다.

 

이 글이 맘에 드셨다면, 하트♡를 눌러주세요!!

작성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