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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입생로랑이 사랑한 코발트 블루의 세상,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

비행청년 a.k.a. 제리™ 2016. 6. 13. 06:53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모로코 삐끼와 한바탕 설전을 치르다 보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아둥바둥대야하나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고 기분이 크게 상해버려서 다 때려치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문제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다는 것!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구글맵을 켜고 위치를 확인해보니 숙소로 돌아가는 것보다 다음 목적지가 그나마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혹시라도 또 방향을 잊을까 두려운 마음에 큰길을 따라 다시금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생전 처음보는 건물과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정신마저 혼미해진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당시에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를 붙잡고 히치하이킹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차와 사람, 자전거와 당나귀가 복잡하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엉키는 아스팔트 도로 가에는 잡동사니를 파는 노점이 들어서 있었다. 옷가지부터 신발, 이어폰에 세제까지 그야말로 오만가지 물건이 바닥에 깔려있는데, 쓸만한 것은 정말 단 한가지도 없더라. 문득 예전에 잠깐 어학연수를 갔던 필리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헬조선이니 어쩌니 해도 1인당 GDP 3,000달러 안팎의 나라에 비하면 우리는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놀라운 점은 불과 50년 전에는 우리의 삶도 저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릿 속을 채워가며 발걸음을 옮긴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르댕 마조렐(Jardin Majorelle), 마조렐 정원이라 불리는 이 곳은 뜨거운 태양과 먼지로 가득 찬 모로코의 일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작은 지상낙원이다.

 

 

모로코가 아직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24년, 프랑스 예술가 자크 마조렐에 의해 지어진 마조렐 정원은 모로코의 하늘만큼이나 푸르고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다. 1917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차 마라케시로 건너온 마조렐은 모로코의 푸른 하늘을 무척이나 사랑한 나머지, 변두리 지역의 땅을 대거 사들여 푸른 하늘을 닮은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조렐 정원의 건물과 벽은 새파란 코발트 블루로 채색되어 있다. 마조렐 사후에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입생로랑이 이 곳에 머무르면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국민들 대부분이 퍽퍽한 삶을 살고 있는 모로코, 그리고 마라케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가꿔져 왔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모로코와 이 곳, 마조렐 정원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때문일까? 마조렐 정원의 입구에서부터 내부에 이르기까지 모로코 현지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관광객, 그것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내가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묘한 감정과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50디르함(6,000원)을 내고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작은 분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졸졸 흐르는 물과 새파란 타일, 그리고 꼭지점을 채우고 있는 울긋불긋한 꽃이 이루는 하모니를 보는 것 만으로도 더위가 씻겨나가는 것 같다.

 

 

약 5일간의 모로코 여행 중에 이처럼 울창한 나무를 본 적이 있나 싶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무와 무성한 잎, 좁은 길을 따라 놓인 아기자기한 화분까지, 불과 20~30분 전까지 내가 알고 겪었던 모로코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마라케시 메디나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가 낙서로 가득한 것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뭐 저기에 이름을 새기는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나무나 알로에 줄기에까지 저런 식으로 낙서를 하는 게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한글로 된 낙서를 보지 못했다는 것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나무 사이로 저 멀리, 강렬한 파란색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핏 신트라에서 봤던 페냐성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페냐성의 아름다움이 빨강, 노랑 등 강렬한 천연색의 조화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건물은 RGB 0,0,255의 순도 높은 파란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마조렐, 그리고 입생로랑이 생전에 머물렀던 별장이 아니었을까?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서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런 정원과 건물을 지어놓고 유유자적하며 노후를 보낼 수... 있겠지? ㅎㅎ 그나저나 별장의 위엄 때문일까? 모로코의 푸른 하늘마저 조금인 빛이 바래 보였다.

 

 

강렬한 파란색 건물에 군데군데 들거간 노란색 포인트가 전혀 거슬리지 않고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런게 예술이구나!

 

 

정원을 하염없이 걷다가 마주친 마조렐 박물관.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건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련된 건물이기도 하다. 오전에 이미 마라케시 박물관을 보고 왔었기 때문에 굳이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마라케시 박물관을 떠올려 보면 안에 들어가봐도 뭐 크게 대단한게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렇게 사진을 골라가면 글을 쓰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헐레벌떡 스치듯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숲과 연못, 그리고 파랑과 노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생전의 입생로랑도 바로 이 곳에서 사진 한 켠에 나온 저 노부부처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혼자 명상에 잠기면서 디자인 영감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소중한 사람과 꼭 한번 다시 이 곳을 찾아 이날을 돌이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조렐 정원을 산책하며 둘러보는 데에는 사실 한 두시간이면 충분하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전 또는 오후 반나절 동안 시간을 내서 산책로를 걷고 중요 포인트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곤 한다. 물론 나도 그랬고... 하지만 일정이 허락한다면 조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이 곳을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고단한 여행길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정원 안에서 사색에 잠겨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몸도 마음도 힐링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훌륭한 정원에서 쉴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일상은 평화롭고 푸른 마조렐 정원보다는 복잡한 황톳빛 마라케시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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