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고 쓰는 일본스토리/Story in Tokyo

[일본문화 체험기 ③] 종교가 흐르는 일본인의 삶

비행청년 a.k.a. 제리™ 2014. 12. 6. 16:19

 

종교가 흐르는 일본인의 삶

 

"카미사마(かみさま), 호토케사마(ほとけさま)... 제발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길."

 

제가 다니는 히토츠바시 MBA의 ICS 과정은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죽하면 ICS가 "I Can't Sleep."의 약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다들 요령이 생겨서 케이스를 대충 읽거나 인터넷에서 정리된 내용을 찾아 수업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고, 가끔은 아예 케이스를 건너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질문을 던지는 이른바 콜드콜(cold-call)이 시작되면, 수업준비가 소홀했던 학생들은 슬슬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 마케팅 수업을 앞두고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 친구가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슨 주문인가 해서 들어봤는데, "카미사마, 호토케사마... @#$% ^%$#@" 마케팅 케이스를 읽지 않았으니, 오늘은 제발 무사히 넘어갔으면 한다는 뜻이합니다. 카미사마, 호토케사마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뭐 대충 '하느님, 부처님'정도 된다나... 그까짓 콜드콜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하느님에 부처님까지 찾느냐며 핀잔을 주고난 후, 저도 '카미사마, 호토케사마'를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거나, 뭐가 불안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신을 찾곤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부처님을 함께 부르면 두 분이 서로 서먹하진 않을까요? 제가 신이라면, 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습니다.(하긴, 그분들은 저와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겠네요.) 하지만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여러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해 신앙생활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토속신앙인 신도(神道)와 기독교, 불교를 함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본인들은 태어나자마자 신사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성당에서 결혼을 한 후, 죽으면 절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보편적일 정도로요.

 

2012년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는 신도 신자가 1억 276만 명, 불교 신자가 8,462만 명, 기독교 신자가 277만 명,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이 943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각 종교 신자의 합(1억 9,958만 명)이 일본 전체 인구(1억 2,700만 명)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 중에는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2개 이상의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아마 제 옆에 앉았던 일본인 친구도 그 중 하나였나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종교라는 것이 일본인들의 삶에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본 거리는 갖가지 종교행사로 떠들썩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를 걷다 보면 웬만한 공원 근처에는 대부분 크고 작은 신사가 하나쯤 있고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재해가 워낙 많은 일본이기에,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토속신앙을 비롯한 종교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은 신도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종교인 불교, 그중에서도 참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참선을 체험해 보기 위해 가마쿠라(鎌倉)에 위치한 엔가쿠지 절(円覚寺)을 찾았는데요. 가마쿠라는 도쿄에서 약 50km, 전철로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에도막부 이전 중세시대에는 무사정권의 중심지였던 가마쿠라에는 아직도 그 시절 번창했던 불교 유산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보슬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지만, 관광객과 등산객들로 역 주변이 북적북적하더군요.

 

  

 

자, 기타가마쿠라역에서 내렸습니다.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 따라가듯 걷다 보니 바로 근처에서 엔가쿠지 입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엔가쿠지는 중세시대 몽고의 침략을 견뎌낸 후, 전쟁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1282년 건축된 역사가 깊은 사찰입니다. 이후, 살생을 업으로 삼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절에서 수양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가마쿠라로 모여들면서, 가마쿠라가 사무라이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다는데요. 그 배경에는 선종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선종에서는 명상(Zen meditation)을 통해 잡념을 떨쳐내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를 중요시하는데, 거듭된 살생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던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명상은 심적 고통을 떨쳐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설명입니다.

 

 

 

 

11월 말임에도 엔가쿠지의 단풍은 절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절에 계시는 스님의 도움을 받아 당시 사무라이들이 했다는 참선을 조금이나마 체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자세부터 익히기 시작했는데, 앉기조차 쉽지 않더군요. 다들 아시겠지만, 양반다리를 한 상태에서 양쪽 발바닥을 반대쪽 허벅지 위에 올려두는 것이 자세의 정석인데요.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원래 가부좌가 인도에서 시작된 것이라, 자세 자체가 다리가 길쭉길쭉한 인도사람에게 적합한 자세라는군요. 달리 말하자면, 다리가 짧고 두꺼운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가부좌가 맞지 않다고 합니다. 설명을 듣는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그만...

 

 

 

명상체험을 위한 법당 내부입니다. 이곳에서는 오른쪽 사진처럼 가부좌하고 앉아 호흡법을 배웁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몸 안에 있는 모든 공기를 밖으로 내보낸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내쉬는 것. 그게 전부였습니다. 순간 '엥? 고작 이걸 배우자고 황금 같은 주말에 새벽잠을 설쳐가며 여기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호흡을 한 번씩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네모난 저의 마음이 조금씩 닳아가면서 결국엔 동그란 모양이 될 것이라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짜겠노 이까지 왔는데' , '마 함 해보입시다'하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먼저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도록 자세를 바르게 가진 후, 호흡에 최대한 집중을 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면서, 고민이 점점 사라지는 단계가 온다고 합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음으로써, 욕심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죠. 이 단계가 지나면 비로소 모든 의식이 사라지는 무념무상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빗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집중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비록 큰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공기 좋은 곳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니 뭔가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엔가쿠지에서는 매년 12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2주간 명상을 하며 수양을 쌓도록 도와주는 특별 강좌가 열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단 4시간에 불과한 수면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동안 법당에 모여 명상을 하는 것인데요. 명상 중간 중간 불교(선종)의 가르침을 듣는 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20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쉰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게다가 밤에도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라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모포 한 장만 덮은 채, 잠을 청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2주간의 생활이 끝나면 ‘생각이란 것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며’ 웃으며 설명하시는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분이 과연 스님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매번 강좌를 열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든다고 하니, 종교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관심이 많긴 많은가 봅니다.

 

 

참선 강좌가 열리는 건물을 소개하는 팻말입니다. '이 절에 참선하러 오는 여러분을 기다리겠다'는 말도 써있네요. 이곳에서는 매주 토요일, 정기 모임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참선을 비롯하여 일본 불교에 대해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토속신앙(신도)과의 융화였습니다. 신도(神道)에서는 자연물이나 자연현상, 심지어 조상들까지 신으로 모시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 숫자가 무려 8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8~9세기 무렵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해 불교 사상이 일본에 전파되면서, 불교와 신도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도에서 말하는 800만 신의 모습 하나하나가 사실은 부처가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 세상에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당시 불교사상이 일본 사회에 거부감 없이 빠르게 흡수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불교와 신도가 공유하고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화(淨化)’와 집착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상태를 뜻하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위 사진처럼 사당을 제외한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두는  일본 전통 가옥의 내부나 절의 법당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명한 일본 브랜드 ‘MUJI’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는 일본의 ‘순수함과 여백’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교 사상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나름의 특색을 갖추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반나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이 아니었나합니다.

 

* 본 포스팅은 자유광장(http://www.freedomsquare.co.kr/)에 기고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