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고 쓰는 일본스토리/Story in Tokyo

[일본문화 체험기 ②] 가부키 현장을 찾다

비행청년 a.k.a. 제리™ 2014. 11. 25. 18:09

 

가부키 현장을 찾다

 

일본에서 18번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숫자입니다. 예를 들어 등번호 '18번'은 일본 야구계에서 에이스를 상징하는 숫자이죠. 최근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원조 괴물투수 마쓰자카를 놓고 벌이는 영입 전쟁의 와중에, 올해 재팬시리즈 우승팀 소프트뱅크가 3년간 총 20억 엔(2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와 등번호 '18번'을 제시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마쓰자카를 두고 소프트뱅크와 경쟁중인 세이부 라이온즈는 마쓰자카 영입에 실패할 경우 등번호 '18번'을 '임시결번'으로 지정하겠다고까지 합니다.

 

일본인들이 의미있게 생각하는 18번을 대표팀 등번호로 달고 경기 중인 마쓰자카 다이스케 선수


일본 야구선수라면, 특히 투수라면 한 번쯤 꿈꾸는 등번호 18번.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번호 '18번'의 의미가 유래한 곳이 바로 일본의 전통공연 '가부키'입니다. 예로부터 가부키의 명가로 손꼽히던 이치가와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극본 중 18편의 명작을 선정했는데,  그중 18번째 작품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서 '18'이라는 숫자가 재능과 인기를 상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애창곡을 말할 때 쓰는 '18번'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하네요.

 

일본에는 '18번'외에도 가부키에서 유래된 단어가 참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니마이메(にまいめ), 미에(みえ)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소년을 뜻하는 니마이메는 원래 2번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극장 간판에 가부키 등장인물을 그려넣을 때, 오른쪽에서 2번째 자리에 주인공(미남배우)을 그려 넣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허세, 허영을 뜻하는 '미에'란 표현 역시 가부키에서 배우들이 과장된 연기를 하는 장면을 가리키는 용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듯 일본인들의 일상용어에까지 아직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부키. 오늘은 이 가부키를 보러 다녀왔습니다. 스모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로 꼽히는 가부키는 에도시대(16~18세기)부터 400년이 넘도록 이어져 내려오는 서민예술입니다.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진 단막극이라고 생각하면 아마 이해가 좀 쉬우실 것 같은데요. 가부키 관람을 위해 도쿄 하마초역 인근에 위치한 메이지자(明治座) 극장을 찾았습니다.

 

 

메이지자 극장은 가부키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공연을 상영하는 문화, 예술 극장입니다. 그래서인지 가부키 전용극장으로 유명한 긴자의 '가부키자(歌舞伎座)'와는 달리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빌딩같습니다. 덕분에 찾아가는 데 약간 애를 먹었네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메이지자 극장은 무려 14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극장입니다. 내부는 세종문화회관과 비슷한 느낌이고, 건물 2층 한편에는 극장의 140년 역사와 함께 에도시대부터 지금까지 가부키의 시대별 특징을 사진으로 설명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건물 입구에는 주연배우 소개와 인사말 영상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했는데, 박명수와 천정명을 교묘하게 합성한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극장 안에서는 공연 내용을 설명하는 책자는 물론, 도시락, 전통과자, 기념품... 심지어 (공연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옷까지 등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마치 작은 백화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예쁘게 포장된 전통 과자인데요. 맛은 호두과자와 비슷합니다.

 

 

식품코너(?)에서는 시식도 할 수 있습니다.

 


꽤 비싸지만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 안쪽에는 식당도 있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가와 구경을 마치고 입장하였습니다. 오늘 감상할 공연은 '십일월화형(十一月花形)'입니다.  가부키 공연은 꽤나 비싼 편에 속합니다. 메이지자 극장의 경우만 하더라도 1층 티켓은 가격이 무려 14,000엔(약 14만 원)이고, 2층은 6,500엔, 3층도 5,000엔입니다. 저는 가난한 학생인지라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람료가 만만치 않지만 꽤 많은 관객이 모여들었습니다. 공연 시간이 15분 정도 남았는데 1층은 사람들로 자리가 빼곡합니다. 공연 시작 무렵에는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공연은 오후 2시가 넘어서 막을 내렸습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은 새하얀 얼굴 분장과 앙칼진 발성, 과장된 동작 등이 TV에서 가끔 보았던 중국의 경극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추정되는 두 여인의 마지막 수중 격투신(?)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일본인 친구들과 가부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가장 놀랐던 것은 가부키 배우는 모두 남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지막 격투신에서 시어머니를 죽인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모두 남자였다는 사실... 심지어 며느리는 아까 위에서 봤던 박명수와 천정명을 닮은 이치가와 엔노스케(市川 猿之助)라는 남자배우였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인터스텔라 못지 않은 반전 아닌가요?

 

 

▲ 현대 가부키공연의 한 장면 (출처:chichibu.co.jp)

 

여자 가부키 배우가 없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애초, 에도 시대의 가부키 공연은 상인층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이때는 여자배우들을 중심으로 공연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모가 뛰어났던 배우들이 공연과 매춘을 겸하는 등 사회적문제를 일으키자 도쿠가와 막부는 가부키 공연을 금지하게 됩니다. 갑자기 밥줄이 끊긴 가부키 극단들은 남자들만 공연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가부키 공연 허용을 요청했고, 막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생긴 규칙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역설적으로 가부키가 예술적으로 고유한 특징을 갖는 원인이 됩니다. 새하얀 얼굴 분장과 독특한 발성, 과장된 동작은 남자 배우들이 '여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또한, 공연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자 역할을 맡은 배우는 남자 역할을 맡은 배우보다 앞으로 나오는 일이 절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동선 역시, 여성의 작은 체구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던 것입니다. 가부키 공연은 연기, 동작, 음악, 발성 등을 통해 드러나는 가부키만의 일정한 약속을 느끼는 것이 감상 포인트입니다. 의외로 내용(스토리 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이죠. 이런 설명을 들으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쉬웠던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가부키 공연에서 쓰이는 언어는 에도 시절의 고어(古語)라 일본인들도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함께 공연을 감상했던 일본인 친구도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별 상관은 없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공연을 보다 보면 분장 유무에 따라 등장 인물을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가부키 특유의 새하얀 분장을 한 배우는 상대적으로 젊거나 비중이 큰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고, 분장 없이 맨얼굴을 드러낸 배우는 비중이 작은 역할이거나 극 중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 어디 술자리 같은 데서 아는 척 좀 할 수 있겠죠?

 

▲ 한국  봉산탈춤 공연 모습 (출처:maskdance.com)

 

많은 사람들이 가부키 공연을 찾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판소리, 마당놀이 같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가부키에 대한 관심이 낮은 편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극장에서 만난 사람들도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고요. 하지만 도쿄에만 해도 가부키 전용 상영관이 2~3개 정도 있고 메이지자 극장처럼 전용관은 아니지만 가부키를 상영하는 곳도 제법 됩니다. 대대로 가부키 공연을 만들어내는 가문도 있고,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인기 배우들이 가부키 공연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아이돌 스타가 참여하는 연극, 뮤지컬에는 관객들이 제법 몰리는 것처럼, 인기 배우의 참여를 계기로 가부키에 관심을 가지는 일본 젊은이들도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문화도 소수의 관계자를 중심으로만 계승, 발전하기보다 대중 속의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웃나라 일본 '가부키 공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 본 포스팅은 자유광장(http://www.freedomsquare.co.kr/)에 기고한 내용입니다.